To Be With

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,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.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,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.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‘곁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, 음악, 사진을 모았다.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.

Text: Kang Yesol, Kim Sunhee, Ahn Yoojin, Oh Yubin
Art: Kim Seongjae
<Marie Claire> KOREA, December 2025 Issue

2024년 12월호, 피처팀 스페셜 공동 칼럼 ‘To Be With’에 참여하였습니다.
한 겨울, ‘곁'의 의미를 되시기며 마음을 데울 만한 영화와 책, 음악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. 
저는 영화 <환상의 빛>, 소설 <희랍어 시간>, 그리고 키스 자렛의 1975년 쾰른 콘서트 라이브 앨범을 소개했습니다. 



고레에다 히로카즈 <환상의 빛>

소박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던 ‘유미코’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사별한다. 몇 년 후, 그는 재혼하여 새 가족이 사는 시골의 섬으로 향한다. <환상의 빛>은 돌연히 한 사람이 떠나간 후,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비춘다. 그럼에도 살아지는 하루, 불현듯 밀려드는 질문과 고통까지 멀찍이 떨어져서 담아낸다. 유미코가 새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, 처음으로 울음을 토해낼 때도, 그의 표정은 끝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. 나는 그 섬세함에 큰 위로를 받았다. 편하게 웃어도 되고, 때로는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. 남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유미코에게 새 남편은 말한다. “아버지가 전에 배를 탔는데,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, 저편에 예쁜 빛이 보인댔어. 빛이 깜빡거리면서 당신을 끌어당겼다는 거야.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을까?”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고, 자신의 상처만으로도 버거울 테니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감정을 누르기에 급급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. 거센 바람과 파도가 치던 유미코의 집 앞 바다에 마침내 따스한 빛이 드리운다. 함께 봄을 맞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가져본다. 너와 나의 벽을 허물고 슬픔을 나눌 때, 가까워질 행복을 기대하며.


한강 <희랍어 시간>

과연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. 그 물음에 대한 내 안의 답이 부정으로 굳어갈 때쯤, 한강의 <희랍어 시간>을 만났다.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은 한 여자. 이들은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으려 애쓰기보다 다른 감각에 기대어 타인을 헤아린다. 캄캄한 눈으로 편지를 쓰고, 말을 대신해 상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. 두 사람은 희랍어를 가르치고, 배우며 마주한다. 안경을 놓친 남자가 어둠에 갇혀있을 때, 여자는 기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. 침묵과 암흑 속에서도 서로를 느끼고, 서로에게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. 잃어버린 것을 채워주기보다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, 그것만으로 내가 지난날 삼켜온 슬픔이 당신에게 조용히 전해지고, 또 당신이 견뎌온 시간이 내게 와 닿을 때, 우리는 조금씩 외로움을 덜어가는 게 아닐까. 어떤 말과 잔상도 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진심의 힘을 믿게 한다.


키스 자렛 <The Köln Concert> 중 ‘The Köln, January 24, 1975, Pt. II A (Live)’


지난여름,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막연히 걷던 중 허름한 문을 발견했다. 비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가보니 그곳은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었다. 작은 공간을 대형 스피커가 메우고 있었고, 벽면에는 CD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. 두 명의 손님이 나간 후 혼자 남았을 때, ‘The Köln, January 24, 1975, Pt. II A (Live)’가 흘러나왔다. 경쾌한 멜로디의 도입부를 지나자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격정적인 연주가 이어졌다. 황홀한 음악 앞에서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. 그 충만한 경험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. 키스 자렛의 1975년 쾰른 콘서트 라이브 앨범은 현재까지 재즈 솔로 앨범의 신기록을 지키고 있다. 하지만 그 공연이 시작을 앞두고 취소될 뻔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. 그는 당시 극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, 준비된 피아노마저 음정이 심하게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. 그 밤, 자렛은 오로지 공연 기획자인 열일곱 살 소녀를 위해 무대에 올랐다고 회상한다. 고통 섞인 신음과 무거운 페달을 누르는 거친 호흡, 몸을 비틀어가며 두드리는 건반 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어 보다 완벽한 즉흥연주로 울려 퍼진다. 이 곡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서로를 위한 마음이 모여 이룩한 기적 같은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.